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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순 시, "외상" 본문

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이미순 시, "외상"

진광불휘 2023. 5. 1. 21:17

 

마는 초등학교 사학년인 내게 외상으로 쌀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시장에서 싸전을 하는 외숙모한테 가는 길
돌계단을 내려와 마을 당산나무를 지나 큰불이 몇 번이나 난 성냥 공장 윗길을 지나 큰길에 들어선다
길 오른편에 과일 집, 나무 궤짝 안의 사과를 보며 잘못도 모르면서 붉어서 간다
역 앞에서 동해남부선 기차를 보낸다 차단기 사이로 재빠르게 지나가는 생각들
외숙모가 지인들과 화투를 치며 기분 좋은 go를 질러댈 때 그 앞에서 멈칫했다
그릇을 구경하고 종이로 만든 색색의 꽃을 구경하고 되박에 수북 담긴 쌀을 보면서 시장 두 바퀴를 돌았다
아버지도 몰랐고 언니 동생도 몰랐던 그 심부름
나는 지금 누구에게 이 심부름을 시키고 있는지를 본다
외상을 입은 나의 자리에 흉터가 남았다
 
 - 이미순 시, "외상" 전문, 계간 <시산맥> (2023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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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붉히고 수없는 상념이 지나가도록 만드는,
그리하여 독자에게 흉터 없이 외상을 입히는 이미순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