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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탈; 이마트 와인장터 후기 본문
연이틀 와인을 샀다. 그것도 한 매장에서.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지만 평소 거들떠 보지 않던 이마트에서, 심지어 대량으로.
와인 장터를 연다고 홍보해서, 살만한 몇 가지를 꼽아 들렀더랬다. 딱 그것만 한두 병씩 구입할 요량으로. 타이슨이었나? '누구나 계획은 있다'로 시작되는 경구를 남긴 이가. 일단 입구에서 카운터 펀치를 맞았다. 장터 개장 이틀 째라 미끼상품인 줄서기용 매대엔 별 게 없을 거라 여겼는데 S으로 시작되는 칠레산 그랑 뱅이 한 병 남았던 거다. 아니 이게 왜 안 나갔지? 가격도 좋은데? 값이 잘 나왔다고 해도 실은 어마아마한 정도. 그래도 일단 카트에 담았다. 고민해 보고 나중에 빼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 앞에 수문장이 있었다. 딱 보기에도 내공이 장난 아닐 것 같은 백전노장의 소믈리에르분께서 나를 응시하며 생글생글 웃고 계셨다(오, 호구왔는가!).
어떤 와인을 찾으세요?
(노련하게)아, 그냥 둘러보려구요.
(더 노련하게)그럼 제가 안내만 해드려도 될까요?
(더욱 더 노련하게 휴대폰 사진을 보여주며)이 와인들을 사려는데 어디 있을까요?
(살짝 미소지으며)일단 이쪽으로 와 보시겠어요?
구대륙 레드 매대 앞에서 그가 건네주는 스트레이트, 아니 포도주에 바로 무릎끓었다.
2015년산 뗌쁘라니오인데요. 무려 이 가격이고 한 병 남았어요.
(가격표를 재확인하며)정말 이 가격이라구요? 더 없나요?
없어요. (그 옆의 병을 꺼내주며) 이것도 보세요. 몬테풀치아노 품종인데 이건 더 싸요. 그리고 두 병 남았어요.
다 주세요.
그는 웃으며 옆 매대로 나를, 아니 내 카트를 끌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때 내 카트는 내게 아니었다. 사실상 그분 꺼였지. 어차피 나는 시키는 대로 하는 그의 노예였으니.
화이트는 안 필요하세요?
가격 잘 나온 게 있나요?
뉴질랜드 쇼블 싸게 나온 건 어떠세요?
제가 그쪽은 전문이라... 다른 걸 권해주시면 좋겠어요.
프랑스 쇼블은 어떠세요? B브랜드에서 최저가로 풀었어요. *원대. 이 정도면 박스로 사도 될 값이죠.
주세요.
몇 병 드릴까요?
음... 일단 두 병. 저 사실 대여섯 병만 사려고 왔는데.
(승리의 미소를 띄우며)알겠어요. 샤도네이는 안 필요하세요?
미국 샤도는 별론데... 다른 걸로 괜찮은 게 있을까요?
칠레 M브랜드에서 오늘만 이 3종을 반값 할인하는데.. 다 괜찮아요. 역대 최저가예요.
칠레산 샤도는 거의 안 마셔봐서...먹을만 해요?
(무슨 소리냐며)아주 괜찮구요. 그리고 이 값이면 반만 마시고 버려도 무방한 수준이예요.
주세요.
화이트뿐 아니라 까쇼, 까르미네르 다 훌륭해요. 그란 리제르바로 이 가격은 다시 없어요.
다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불란서 매대까지 나를 끌고 왔다.
프랑스 샤도는 어떠세요?
값이 문제죠. (반항하듯)다 아시면서.
샤블리 반값에 나온 게 있어요.
싼 샤블리는 이름만 샤블리더라구요. 샤블리 빼고.
(옆의 옆 병을 꺼내며)보르도 샤도가 싸게 나왔어요. 만 원대.
만 원대 샤도가 괜찮을까요? 그리고 보르도인데?
비비노 평점 3.7이예요. 흠잡을 게 없어요.
주십시오.
부르고뉴 샤도는 어때요?
저 이제 돈 없어요.
(씨익 웃으며)이게 2만원대예요. 저도 이런 가격은 처음 봐요.
맛있을까요?
불곤 샤도인데 아무리 못 해도 기본은 하죠. 담으세요.
넵!
카트엔 이미 술만 열 한 병.
이제 갈래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쉬라즈는 안 사세요?
저 간다니까요?
구경만 하세요. 이게 *원대. 맛 좋아요. 아주 잘 나왔어요.
(망설이며)*원이면 정말 싸긴 한데....
고기 재울 때만 써도 이득이예요.
주세요.
슈퍼 투스칸은 안 필요하세요?
그건 비싸잖아요. 저 이미 예산 초과예요.
카드 할인까지 더 하면 4만원대. 해외가격보다도 싸요. 이게 우리 장터의 대표 상품.
(그로기 상태로)음...
두 병 남았는데.
주십시오!
그렇게 저렇게 해서 이십 여 병을 들고 왔다는 얘기.
주말에 두 병을 마셔보니 그분 말씀은 틀린 데가 없었다. 다 좋았다. 틀려먹은 건 내 지갑뿐.
좋은 값에 좋은 와인을 잘 샀는데, 기분이 왜 씁쓸한 지 모르겠다. 아마 명백한 패배 때문이겠지. 앞으로도 계속 질 것만 같은.
그러나 김X아 소믈리에르님, 앞으로도 자주 뵙겠습니다.
충성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