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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싸구려 와인 맛있게 만들기

진광불휘 2024. 10. 20. 12:59

 



H마트 10-2 행사에서 5천9백원 짜리 스페인 레드를 한 병 끼워서 샀다. 호주 와인 4병으로는 2만원 할인 조건인 총액 10만원에서 5백원이 모자라서. 몇 종의 5천원대 와인 중에 비비노 점수를 비교해 걔중 제일 나은 놈으로. 평점 3.5는 그래도 꽤 마실만한 술이란 뜻이니. 마트마다 가성비를 주장하며 5천원대 와인을 미끼상품으로 팔고 있지만 사실 그 와인 대부분은 현지에서 1달러 내외다. 싸다고 매겨놓은 5~6천원이 실은 바가지로 느껴진다. 실제로 마셔보면 살만한 5천원대 와인은 L마트의 나투아 까쇼와 쇼블뿐이다. 나머지는 형편없다.

굳이 평점까지 비교해 샀지만 이번에도 5천원대 와인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다. 실제로 금요일 저녁에 코르크를 따서 맛을 보니 그냥 그랬다. 확 튀는 알콜향, 이도 저도 아닌 아로마. 들쩍지근한 맛, 존재하지 않는 부케... 그냥 딱 마트의 5천원짜리 와인이구나 싶다. 한두 잔 먹다 다시 밀봉해 냉장고로. 나중에 고기 재울 때나 써야지. 

그러다 토요일날 친구를 집에 데려와 시덥잖은 유튜브나 틀어놓고 수다를 떨면서, 어제 먹던 와인을 다시 마셨다. 오븐에 구운 기름많은 돼지목살에 발사믹 샐러드를 안주로. 별 생각없이 후루룩. 그런데 이런, 와인 맛이 전혀 달랐다. 이거 뭐야, 맛있잖아? 

눈을 비비고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마셔봐도, 역시 그랬다. 슈퍼 초 울트라 캡숑은 아니지만, 상당히 괜찮은 적포도주. 왜지? 모든 레드와의 궁합이 최고라는 구운 돼지고기가 안주라서? 아니면 샐러드 드레싱인 발사믹 식초가 같은 레드와인 계열이라?

어제는 심지어 비슷하면서도 더 좋은 안주에다 마신 까닭에, 메뉴가 달라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딱 하나, 친구와 먹었기 때문일 거다. 오랜만에 거리낄 것 없이 편안한 자리니까. 그렇게 꿀꺽꿀꺽 남은 병을 바닥까지 비웠다. 끝까지 기분좋게. 

최근에는 점점 더 좋은 와인을 찾게 된다. 기존에 먹던 와인이 맛이 없어서. 새로운 걸 찾기도 하고, 급을 높여서 꽤 비싼 와인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그래도 새로운 발견이 거의 없다. 눈이 확 뜨일만한 포도주, 이거다, 할만한 게 없다. 그냥 돈X랄에 불과하다.

유교의 옛 일화에 '나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얘기가 있다. 공자가 들른 한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데도 이사를 가지 않은 아낙이 있어 이유를 물었더니 '그래도 여긴 나쁜 정치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내 경우엔 그 얘길 살짝 비틀어봐도 좋겠다. 친구가 없으면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스스로 외롭다고 느낄 때 감각은 불확실해지고 인지능력도 뒷걸음질치고 만다. 무엇을 보아도 들어도 먹어도 흥미롭지 않다. 세계는 그저 밍밍하다. 

실제로 저 5천원짜리 와인이 진짜 괜찮은 술인지는 모르겠다. 평점 3.5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점수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편한 친구와  있자면 싸구려 와인도 아주 향기로운 술이 된다. 우리네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관계에 좌우된다. 그러니 나처럼 멍청하게 비싼 술이나 음식을 사기보다는 저렴한 걸 먹더라도 마음을 터놓는 이와 함께 하길. 

그런 이가 없다면 품과 시간과 배려를 들여 반드시 한 명은 친구로 만들길. 인생은 예상보다 훨씬 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