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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싸구려 와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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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5천원 이하의 포도주를 싸구려 와인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말이다. 유통되는 상품의 원가가 1/3 이하라는 걸 감안한다면, 이 와인들의 수입가격은 1달러에서 비싸도 2달러가 넘지 않을 거다. 몇 해 전 와인붐이 일면서 대형마트들이 앞다퉈 3천원에서 5천원 사이에 와인을 출시했는데, L마트의 나투아를 제외하면 그 가격이 저렴하기보다는 딱 맞거나 오히려 비싸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윤이 많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한시적 미끼상품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이제 그런 와인들을 매대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상품의 질이 낮은 까닭에 '초저가'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그런 와인도 희석식 소주와 비교할 순 없다는 게 나의 평가다. 나투아 까쇼를 제외한다면 다른 5천원 이하의 포도주가 맛있다고는 할 수 없다. 허나 그렇다고 소주와 비슷하다거나 그 값이면 소주가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아주 독실한 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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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접할 일이 있어 오랜만에 와인을 많이 샀다. 화이트 스파클링을 시작으로, 쇼비뇽 블랑, 샤도네이, 이탈리아 블렌드, 말벡, 이탈리아 토착품종을 사용한 와인으로 코스를 꾸리고자 했다. 손님접대를 위해서니까 검증된 와인으로만 골랐다. 하나같이 맛있고 싸지 않은 것들이었다. 손님들도 만족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게 평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와인을 먹었으니 좋다고 할 밖에. 달리 말하자면, 와인의 품질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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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 와인을 먹을 때면 거품을 하도 많이 붙여놔서 병당 4~5만원을 내고도 1만원 내외의 저가 와인을 마시게 된다. 한심한 일이다. 그래서 콜키지가 되는 술집을 가거나 집에서 마시게 된다. 두세 병 값이면 괜찮은 것들로 코스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가끔씩은 비싸도 그냥 밖에서 마시게 되는데, 그러면 거의 100% 저가 와인을 마시게 된다. 비비노 점수 3.0에서 3.3 사이의 아주 평범한 포도주, 향도 약하고 탄닌도 적고 맛도 어설픈 와인이 나온다. 걔중에는 묘한 냄새가 나거나 산화했거나 쓴 맛이 있는 와인을 만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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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밌는 점은 그 자리가 와인이 어떤가는 전혀 상관없는 시간이 될 때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와인의 품질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 와인이 맛이 없어도 괜찮고, 안주도 엉망이어도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것. 오직 그 자리의 만남이 중요하지 다른 것은 지극히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술이 맛있었던 자리는 오직 술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빈약한 시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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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와인을 마셔도 행복한 자리, 훌륭한 와인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무관한 자리가 그립다. 그래도 내 인생에 그런 자리를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두 셋은 있는 것 같다. 아주 가까운 이가 한 명 빠졌지만,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충분하지는 못해도 여전히 한둘 쯤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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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너는 타인에게 그런 사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