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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빵버터 본문
*
친구, 친구의 친구('친친')와 함께 야장에서 술을 마셨다.
전에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제가 사겠다며 친친이 먼 길을 오면서도 레드와인을 싸들고 왔다.
미국산 'BREAD and BUTTER', 일명 '빵버터'
원래는 칠레산 MOLINA를 가져오겠다 했는데 없어서 직원의 추천을 받았다고.
이름대로 빵과 버터향이 은은하고, 탄닌까지 부드러워서 그야말로 술술 들어갔다.
한 병뿐이라는 게 아쉬웠을 정도. 기분좋게 나눠마시며 낯가림도 없이 수다를 떨었다.
오래 본 사이인양 순순했다.
바로 헤어지기 아까워 근처 막걸리 집에서 2차를 가졌다.
술이 약한 친친이 먼저 일어나고, 친구와 남은 술을 비우다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듣는다.
*
가능하면 코르크 차지가 되는 술집을 찾게 된다. 대기업 술은 맛이 없어서.
심지어 맛도 없고 품질도 낮은데 비싸서 더욱 그렇다.
콜키지가 무료인 곳은 드물고, 병당 1~2만원 가량 한다.
두셋이서 두 병을 마신다면 안주값 빼고 보통 2~4만원을 더 내는 셈.
게다가 와인도 사서 가져가야 하니 와인값을 포함하면 5~10만원 가량이 든다.
부담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데, 대신 내가 고른 와인이므로 품질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특별한 경우에만 이용하게 된다. 되도록 안주만 포장해서 집에서 먹는 게 이득이다.
*
콜키지가 되는 집이라도 와인을 적정 온도에 마시기는 쉽지 않다.
시음 온도를 맞추기 힘든 여름이나 겨울은 물론이고 봄가을에도
권장 온도인 레드 18도, 화이트 12도, 스파클링 7도 전후로 맞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에어링할 여유가 없어 좋은 와인일수록 아쉬워진다.
보통 섭씨 24도 전후인 술집의 실온을 감안하면, 가장 무난한 선택은
미국 와인을 골라 얼음팩과 동봉해 가져오는 것이다.
대중적인 미국 와인은 뽕따한 직후에 마셔도 향미가 잘 풀리므로.
어제 친친이 가져온 '빵버터'도 그런 와인이었다.
어디 하나 모난 데가 없고, 향과 맛이 모두 훌륭했다. 바깥에서 마신 덕에 시음온도도 적당했고.
*
친친이 먼저 귀가한 후 친구가 얘길 해줬는데,
친친의 아버지가 한국 현대 철학의 거목인 K선생이라는 거였다.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었고, 그와 함께 공부하는 게 인생의 목표라는 후배도 있었는데.
듣고 나니 친친의 이력을 다시 보게 됐다.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여러 대학에서 강의 중이며,
화통하면서도 깍듯하고,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그가
여러 측면에서 K선생과 겹쳐 보였다. 물론, 선입견 탓일 수 있겠으나.
*
물론 친친은 K선생의 혈연이지만, 독립적인 인격체다. 당연히 그렇다.
친친을 통해 K선생의 사생활을 파고들 생각 따위는 안 한다.
그냥 이런 배경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평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수다 떨고
와인잔을 기울일 것이다.
다음에는 드라이한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늦가을이나 되겠지.
*
빵 버터 와인은 이름 그대로, 버터 바른 빵만 곁들여도
아주 흘륭한 만찬이 된다. 좋은 와인은 그 자체로 근사해서, 굳이 마리아주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이 되고픈 욕심이 있었는데
요새 내 꼴을 보면 그러기는커녕, 헛꿈 꾸지 말고 하던 일이나 잘 해야 될 것 같다.
인간에 대해, 또 자신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갖지 말기로 하자.
공동작업은 무난하게 처리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좋아하는 와인이나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자.
*
그것만 해도, 얼마나 굉장하고 또 감사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