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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부산에서 돌아와 긴 여행을 앞두고 본문
정말 오랜만에 친구 J를 봤다. 뻔질나게 그의 부산 집을 숙소로 썼지만 주 5일을 울산에 근무하는 그와
만난 시간은 막상 얼마 안 된다. 그가 주말에도 바빴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둘이 간신히 맞춘
시간이 지지난주의 일요일 하루였다. 점심에 해운대에서 만나 그가 좋아하는 평양냉면과 수육을 먹고
달맞이길의 오래된 빌라를 개조해 너른 바다를 발코니 아래로 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을 떠들었다. 동네 횟집에서 제철 숙성회에다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밀키트를 조리해서 와인도 마셨다. 다음날 그가 출근해야 해서 자리는 일찍 파했다.
그래도 10시간 가량이나 그와 함께 있었으니 만족한다. 올해 그를 더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디.
이럴만큼 그도, 나 역시도 불안정한 시절에 있다. 십여 년을 만났는데, 일요일의 우리가
노년 이전에 마지막으로 좋았던 모습일 수도 있단 생각도 든다. 이제 나는 삶을 믿지 못하므로.
그가 출근하고 난 집에서 멀뚱거리다가 동네 김밥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무주에서 책을 쓸 때
크게 신세를 졌던 P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선생님도 바쁘셔서 여러 번 시간이 변경된 끝에
오후 5시 반에 대전에서 만나 함께 대청호를 돌았다. 부근의 오래된 면옥에서 닭고기로 육수를 낸
냉면을 저녁으로 먹고, 역으로 이동해 짧은 시간이나마 차도 마셨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고 기도를 부탁드리기도 했다.
덕분에 기차를 다양하게 탔다. KTX를 타고 내려가서, SRT로 대전까지 갔으며, 귀가할 때는
ITX를 이용했다. 운이 좋아서 옆좌석은 대개 비었거나 조용했다. 7시간 여를 탑승한 셈인데
전자책을 보느라 심심치는 않았다. 내가 앞으로 기차여행을 할 일이 많이 남았을까 모르겠다.
나의 여행도, 이동도, 파트너도 완전히 바뀌겠지만 그 이상 차원이 다른 변화가 생길 것이다.
소소한 행복을 포기하진 않을 셈이라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되겠지. 방식이 바뀔 따름이다.
부산의 날은 맑았고, 대전의 날은 더웠다. 기차가 영등포역에 들어서면서 비가 쏟아졌다.
먹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세상에 있다가 한 시간 여만에 폭우가 몰아치는 풍경으로 바뀌자
마치 다른 세상으로 로그인한 기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렇기도 했다.
제천에 있는 친구와 서울 서쪽의 선배를 만나야 하는 일이 남았지만 숙제를 많이 해결한 느낌이라
굉장히 홀가분해졌다. 고마운 일이다. 내년으로 미루지 않고 올해 다 끝내겠다.
9월부터 11월까지 아주 바빠지겠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도 결코 만만치 않은 일정이
나를 기다리겠지만 인연들을 이어가겠다. 이번에 만난 분들이 하나같이 마음을 다해
위로해 주셔서 기껍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의지할 사람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크게 노력하지 않고 얻었으나
최소한 간직하고 유지하는데는 적지 않은 애정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어깨에 힘들이지 않고
무리없이 발맞춰 가리.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진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발터 벤야만이 <일차원적 인간>에서 했던 말이다. 요즘 이 문장을 자주 떠올린다.
나의 희망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희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할 수 있는 일과
기도해야 하는 일이 병존하는 세계에서 종종 계획과 기원을 혼동하며 두터운 안개 속을
걷고 있다.
올 여름은 이렇게 끝난다. 아주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아직 가닥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단촐해진 건 사실이다. 감사를 전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세세히 헤아리고
한계를 파악한다는 건 작지만 소중한 구원이다. 그리고 그런 구원이 자신을 구하고,
때로는 타인도 건져낸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한 이들이 알려준 건 결국 그것이겠다.
알게된 바를 이행하겠다. 앞으로도 세찬 비가 쏟아지겠지만 작으나마 우산도 있고,
우비를 빌려줄 친구도 있다. 그거면 된다. 앞으로 가야 할 길도 혼자가 아니다.
어깨를 빌릴 때도, 온 몸을 빌려줘야 할 때도 있을 거다. 가끔 신세지면서 그렇게 가면 된다.
투어가 다시 시작되겠지. 아주 낯선 형태로. 희망을 받았으니 또 건네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