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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잃음들 본문
가끔씩 서랍을 열어 눌러둔 이름을 꺼내 어루만진다. 밀어낸, 이별한, 사라진 이름들을.
그리고 주머니속 꼬깃꼬깃 접어둔 말들을 펼쳐 그 이름 위에 포개어 본다.
괴로웠니, 미안해, 안 갈께, 전화해, 괜찮아, 용서해 줘. 말들은 버석이며 잘 달라붙지 않고 겉돈다.
덧붙인 말들은 곧 휘발해 버리고 오두카니 이름만 남는다. 이윽고 그 이름들은 공중에 떠오른다.
물기가 빠지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이름들, 낡고 닳고 더러는 삭았으며 접힌 자리마다
병색이 완연한 이름들. 원색이 빠져 바래 무채색에 가까운 이름들.
그 이름들을 병상에 눕혀 내 피를 수혈할 수 있다면 언젠가 살이 차오르고 온기가 돌아
주인을 초혼할 수 있을까. 더이상 만날 수도 없는데 이름만은 여직 곁에 있다.
한때는 흔적까지 지우려 피가 흐를 때까지 박박 문질러댔던 이름들,
난데없이 술자리까지 찾아와 난장판을 만들던 이름들, 바다를 몇 번이나 건넌 호텔에
먼저 들어와 앉아았던 이름들. 과거란 이토록 열렬한 것인가.
존재없이도 이름만으로 충분히 다사로우니. 다행히 이름은 언제든 휴대할 수 있고
불러낼 수 있으며 함께 있을 수 있구나. 이따금 안부도 묻고, 원망도 토하며, 비밀까지
나눌 수 있구나. 그러면 이름들은 이렇게 외따로 살아가는 것일까.
존재와 아무런 끈도, 접점도, 신호도 없이.
이름이여, 그러니 너도 외롭겠구나.
가라앉은 이름을 한 번 더 어루만진다. 그러면 이름은 순간 움찔했다가
옆구리에서 쓰윽 손을 빼 나와 마주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