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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신이 그립다 본문
*
오래 전에 K라는 아주 큰 회사에 다닐 때, 불합리한 업무체계에 질려 입사 딱 1년이 되는 날
그만두기로 했다. 마침내 그 날, 출근하자마자 다른 어떤 일도 보지 않고 회사에서 받은
노트북을 켜 따박따박 사직서를 작성해 공용 네트워크 프린터로 출력 명령을 내렸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은 오늘로 끝! 인쇄된 사직서를 상사에게 내밀고 그대로 퇴근,
아니 퇴사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필 공용 프린터의 토너가 떨어져 사직서가 나오질 않는 거였다.
이 회사는 제대로 되는 게 마지막까지 하나도 없군! 나는 재킷을 벗고, 셔츠를 팔목까지 걷은 후,
프린터를 뜯어 바닥난 토너를 뽑아서는 윗층의 경영지원팀으로 찾아가 토너를 반납하고,
새 토너를 받아서는 다시 내 사무실로 돌아와 프린터의 토너를 교체하고 꼈다 켜
그동안 동료들이 생각도 없이 출력 명령을 내린 수백장의 문서들이 뽑아져 나오길 기다렸다.
그 문서들 사이에 한 장의 사직서가 있을 것이었다.
퇴사는 그 의미없고 성가신 작업들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간신히 이루어졌다.
예상과는 전혀 달리 한없이 모냥 빠지게.
*
저만의 고통을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먹먹히 감내하는 순간에도 일상은 계속된다.
스팸전화가 오고, 채소는 시들고, 벽시계는 멈추며, 고지서는 돌아오고, 전구는 꺼진다.
급히 어딜 가야 하는 순간에도 엘리베이터는 고장나고 수도는 새며 스마트폰은 먹통이 된다.
*
그런 와중에 작년분 세금을 냈다(자영업자와 프리랜서는 전년 소득을 후년 5월에 낸다).
손택스는 여전히 왜 그렇게나 팝업이 많은지. 주의사항, 체크해야 할 것은 왜 그렇게나 질기게
따라붙는지. 개인정보가 달라진 건 없는데 왜 매번 같은 걸 입력해야 하는지.
세금 낸 계좌로 환급해 주면 될텐데 왜 환급용 계좌를 따로 적으라는지.
국세든 지방세든 결국 내가 내는 돈은 같은데 왜 별도로 납부하게 만드는지(너네가 나누면 되잖아!).
*
번다한 일상의 중력은 아픈 사람도, 아프지 않은 사람도 손속없이 가멸차게 찍어누르나니.
*
줄리언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다산책방, 2016)의 첫 문장은 이렇다.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그립다.
나 역시그렇다.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그립다.
나 역시그렇다.
오늘은 특히.
번잡하고 잡다하며 소모적인 일상들이 오늘만은 피해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