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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그랑 뱅 Grand Vin

진광불휘 2022. 3. 13. 16:11
소싯 적에 그랑 뱅 와인을 찾아 마셨다. 아무 것도 모를 적에. 유명하고 좋다니까 혹해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법한 샤토의 와인을 무턱대고 사다 먹었다. 그 시절 그랑 뱅은 대개
백화점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담당자가 추천하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나같이
최신 빈티지의 와인들이었다. 병입한 지 2~3년도 안 된. 마시는 족족 실망했다. 향도 약하고
물 탄 것 같은 와인을 이 값을 내고 먹어야 한단 말야? 그 뒤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매장에 들를 때마다 '프랑스 와인을 제외하고 추천해달라'고 주문했다.
지금도 프랑스산 와인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가성비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그저 품질이 한심해서다.
 
그러다 임승수의 책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수오서재, 2021)을 읽게 됐다.
그간의 악평이 와인의 품질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시음 적기', 이 책에서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열쇳말이다. 생선회와 마찬가지로 숙성한 와인은 어린 와인과
전혀 다른 맛을 낸다고 했다. 실제로 그런 지 궁금했다. 집 근처 매장을 전부 뒤졌지만
시음 적기의 와인을 파는 집은 없었고, 있다 해도 감당하기 힘든 가격을 불렀다.
그래서 애호가들은 해외직구로 산다나. 그렇게까지 하기는 번거롭다.
 
얼마 전 홈플에서 와인 장터를 열며 시음 적기의 이태리 와인을 5만원대에 판다고 알렸다.
이태리 와인이지만, 슈퍼투스칸이고, 프랑스의 그랑 뱅들과 비슷하다고.
시음 적기 와인의 특징을 잘 구현했다고 했다. 수량이 딸려 2013빈을 구하지는 못 했고
2015빈도 놓치고 가까스로 2016빈을 가져왔다. 2017빈은 강건해서 2033년부터가
시음 적기인데 2015. 2016 빈은 부드러운 편이라 지금이 시음 적기에 들어간다고.
 
그래봐야 5만원 짜리 와인이다. 엄청 좋은 건 아니란 얘기. 큰 기대 없이
2시간 쯤 병 브리딩을 시키고 첫 잔을 따라 마셨다. 아직 어린 티가 났다.
2015를 구했어야 했는데. 천천히 마시기 위해 다른 화이트와 번갈아 들이켰다.
 
두 잔째부터 와인이 살아났다. 다양한 향기, 강하지는 않지만 섬세한 꽃내음,
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이 균형잡힌 맛, 여전히 좀 쎄지만 목젖에 달라붙는
탄닌, 훌륭했다. 좋은 와인은 다채로운 맛과 향기를 내면서도 마치 물을
마시는 것처럼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냥 술술 들어간다. 대단하구나.
연신 감탄하며 홀린 듯이 흡입했다. 10만원대, 20만원대 와인들과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책에서 읽은 대로, 그랑 뱅의 특징을 빠짐없이
구현하고 있었다. 빠져들겠는 걸? 패가망신하기 딱 좋네!
 
앞으로도 프랑스의 그랑뱅을 찾아마실 지는 모르겠다. 코로나 국면이 끝나서
파리로 움직인다면 그럴 지도. 하지만 구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국적을 막론하고
시음 적기의 와인은 종종 찾아 마실 예정이다.
 
2022년은 화이트로 범주를 넓힌 해, 또 시음 적기의 와인들까지 마수를 뻗치기 시작한
해라고 할 수 있다. 20년을 마셨는데도 계속 신기한 게 나온다. 저변이 넓다는
뜻이겠지. 재밌다. 재밌으면 해야지. 이건 혼자서도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이니 더욱.
 
평론가들은 병입한 와인을 평가해 미래까지 내다보며 점수를 매긴다지만,
인간의 심미안은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다. 세월은 나름의 계획을 갖고 있다.
사실 뱅을 그랑 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시간일뿐.
6년 전에 이탈리아 포도밭에 깃든 비의 맛을 본다. 세월이 이런 향기를 자아낸다니
인생도 살아볼만 하다. 산 펠레치 비고렐로 2016 San Felice Vigorello 2016,
근사하구나. 또 만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