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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의 밥 본문

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한 공기의 밥

진광불휘 2024. 4. 30. 00:13

 

배곯은지 오래라 눈 앞에 밥이 보이기만 한다면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먹고 싶었던 한 때가 있었다.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함께 식탁에 앉아 주었는데, 그중 많은 이들은 제가 가진 밥을 퍼서 내밀었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밥을 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본인은 나눠줄만큼 넉넉히 밥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은 내키지 않아서 혹은 주고 싶은 건 김 몇 장뿐이어서 또는 너의 배고픔은 일시적인 거여서 지금 꼭 밥이 절실한 건 아니다 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당연히 잘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가 가진 밥이 내 게 아니고, 안 준다면 별 도리가 없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눈 앞이 팽팽 돌고 있는데 들고 온 밥을 등 뒤로 감추며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게 야속했지만 강요할 순 없는 거니까. 서로의 입장이 이렇게 다르구나 생각하며 헤어졌다. 

심각한 허기의 시절이 지나고 이제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종종 배고픔을 느끼면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당시 밥을 나눠준 이들과 여전히 만나며 상대가 곯고 있지 않은가 늘 살피게 되는데, 그때 밥주기를 거절한 이들한테 연락받는 경우가 간혹있다. 지금도 배를 곯고 있냐고, 일단 다시 식탁에 동석해 보겠냐는 거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제안이다.

그들과 내가 한 식탁에 앉게 될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가. 나는 당시 상대의 태도에 따라 차분히 가부를 답하겠으나 그 누구든 밥상에 동석하는 일은 벌이지 않을 사람이다. 그들의 방식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받아들일수 없다는 것뿐. 그리고 설령 두 번 째 자리에서 다른 경우의 수가 펼쳐질 지라도 거기까지 내가 갈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 

언제나 여기가 로도스고, 우리는 여기에서 뛰어야 한다. 과거와 같은 상황을 만들고 다른 선택을 통해 덮어쓰기를 시도하는 일은 그저 현재를 낭비하는 무망한 짓일 따름. 

방금 위 문장은, 그런 일을 수없이 경험해 본 당사자의 고백이기도 하다. 바보짓은 충분하다, 이제 그만. 

덕분에 밥 한 공기의 체적과 비애를 배웠다. 그래서 고맙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 순간이라도 같이 앉아준 일만은 기껍고 반가웠다. 거기서 배운 바를 행동에 옮길 것이다. 더불어 당신과 나의 시간은 갈라져 버렸다. 내가 마주할 일 없는 그 세계의 크로노스 속에서 당신이 원하는 결과를 이루길 빈다.

실은 그저 무방할 뿐이나. 

아디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