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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바다 건너의 시간

진광불휘 2024. 12. 2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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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는 비율이 이제 한국과 V국이 5:5가 되었다. 놀라운 일. 이 특유의 다정함이 내가 그 나라를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지. 곧 다시 D'로 떠난다. 지난 D여행은 날씨가 험악해서 계획이 파탄났지. 풍랑이 몰아쳐 사흘 간은 바닷가에 나가보지도 못했다. 해변도로가의 하이랜드 커피까지 가는 것만도 몹시 힘겨웠네. 호텔 창 너머 무섭게 몰아치는 파도를 넘겨보며 오들오들 떨었더랬지. 예약했던 식당까지 못 가고 그랩 푸드를 시키는 게 최대한이었다. 옛 도시 H도 T강이 범람해 호텔까지 취소했고. 

그래도 다시 만나 반가움을 나눈 H, 새로 인사를 트고 친해진 H스파의 사장님 형제, 멀리 한인촌의 M친구들은 재밌었지. 잊지 않고 인사를 보내준 R가게의 오래된 친구와 D'에서 은인처럼 뵙게 된 V도 고마웠다. 상냥한 대화를 주고받는 일은 작지 않은 행복. 거기에 국적은 의미없구나. 

그러나 가장 재미난 것은 언제나 동행과 돌아다니는 일. 혼여도 어렵지 않지만 거기엔 견줄 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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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한국이 아주 잠깐씩 들르는 기항지 같은 처지가 됐다. 그러나 주말을 껴서 돌아와 최대한 집회에 참여하고, 온오프로 연대해 숱하게 성원을 보낸다. 그러니 서울에서도 사실 쉬지 못한다. 신년에도 다시 D'로 떠났다 한참 있다 돌아와 또 며칠을 보낸 후에는 D국을 경유해 F로 간다. 차를 빌려 와인가도를 가로지르는 아주 멀고 긴 여행이 잡혀 있다.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지만 동행들 덕에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몸만 가면 되는 여정.  

그렇지만 거기서 마시는 포도주가 과연 내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줄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이 어두운 정서에. 모르겠다. 그러나 앙망하지도 지레 단념하지도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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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겨울 이후에도 바다 건너에 오래 있을 계획이다. 초봄에 T국이나 L국에서 한 달 쯤. 그리고 꽃이 피는 시절에는 한국의 봄을 만끽하다가 늦봄 무렵부터는 내 작은 차를 몰고 해안선을 누벼볼까 한다. 서해에서 남해를 거쳐 부산 친구집에 기항지를 두고 동해로 올라오는 여정도 괜찮을 듯.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 전국 일주가 될 수도.

하지만 방점은 해외에서 일정 없이 한 달쯤 사는 것. T, L, V 국 중에 한 나라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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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있을 리가 없지.
그러나 신선함은 매일의 괴로움과 절망을 희석해줄 게다. 내가 바라는 건 그 하나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