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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 "병에게" 본문

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조지훈 시, "병에게"

진광불휘 2024. 2. 27. 00:01

 

 
 
어딜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날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비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삶의 외경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게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 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 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애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때는 
자네는 몇날 몇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보세 그려
 
 - 조지훈 <병(病)에게>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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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선생이 투병 중 쓰셨다는 생애 마지막 작품. . 
서늘하게 되읽히는 구절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