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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랄리티Minerality 본문
화이트 와인이나 내추럴 와인을 마시다 보면 가끔 독특한 쓴 맛과 짠 맛을 감지할 때가 있다. 광물맛, 지구의 맛(earthy)이라고도 하고 흔히는 미네랄리티로 통용되는데, 대중의 기호와도 다르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와인의 풍미하고도 거리가 있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사실, 호불호가 갈린다기보다 싫어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실제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여러 번의 여과와 가향 과정을 통해 특정한 방향의 향미를 내도록 직조된 것이다. 특히 쓴 맛과 짠 맛은 그중 가장 세심하게 조절된다. 최근의 내추럴 와인 붐은 와인의 과잉 발효를 막아주는 이산화황을 쓰지 않음으로서 강해지는 신맛을 미각의 포용성 속에 담아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실제로 잘 만든 와인을 맛보면, 이 짠맛과 소량의 쓴 맛마저도 우아하게 다듬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조자들의 솜씨는 정말이지 굉장하다.
작년부터는 레드 일변도에서 벗어나 화이트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대개 그렇듯 만만한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부터 출발했는데,알다시피 가성비가 높아서 만 원대부터 큰 만족을 준다. 여름날 가벼운 안주와 마시는 스콧 쇼블이나 좋은 자리에서 곁들이는 크래기 레인지 쇼블을 홀짝이고 있으면 인생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깨달음은 병이 비워짐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지만.
그렇게 뉴질랜드 쇼블부터 시작해서, 남아프리카 슈냉 블랑, 독일 리슬링, 미국 샤도네이 등으로 넓어졌다. 이번에 B국에서는 처음 들른 와인샵에 한국에서도 프랑스 현지에서도 살 수 없는 가격에 나온 브루고뉴 사도네이가 있어 냉큼 집어들었다. 프랑스 와인은 내게 금기에 가깝다. 흔히 그렇듯 가성비가 한없이 떨어지고, 이름난 브랜드도 엉망인 경우가 많으니까. 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그랑 뱅이라고 터무없는 가격을 붙여둔 와인을 좋다고 마시는 사람이다. 그 값이면 훨씬 좋은 와인이 쌔고 쌨는데. 전통을 마신다고? 웃기고 있네. 뭔 전통이 한심한 와인을 바가지 씌우는 짓이더냐?
현지가보다 싸게 나왔다고는 했지만 결코 싸지만은 않은 와인을 사들고 가서 닭날개, 새우구이를 그랩 푸드로 시켜 조심스레 들이켰다. 레몬, 사과 같은 향이 났지만 그닥 강한 편은 아니어서 첫 인상은 밋밋했다. 그리고 한 모금 입안에 넣고 만끽했는데... 세상에, 완벽한 와인이 거기 있었다. 바디감이 또렷하면서도 부드럽고 열대 과일의 향취가 은은히 퍼졌다. 가장 좋은 것은 피니쉬, 그러니까 여운이었다. 와인을 삼키고 난 뒤 그 와인의 맛과 향취가 5초 이상 퍼져 나왔다. 이래서 부르고뉴가 화이트로 샤도네이만 재배하는 거구나. 배우 윤여정씨가 왜 화이트만 마시는 지 알겠다.
와인 사이트를 뒤져보니 내가 마신 건 그중 엔트리급의 와인이라 가장 덜한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그 안에 아주 소량의 미네랄리티를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면서도 아주 자연스럽다 생각되는 맛. 철저하게 매만져서 모난 구석은 없지만 테루아르의 개성을 함축한 듯한 맛. 다시 말해, 포도밭의 흙맛.
귀국해 와인샵을 뒤졌지만 같은 와인을 찾지 못했고, 동급의 와인들도 거기서 산 가격과는 비벼볼 수 없었다. 한참을 더 내야 비슷한 화이트를 맛볼 수 있겠지. 그래도 종종 브루고뉴산 샤도네이를 마셔볼 생각이다. 미네랄리티에도 익숙해지고.
가장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 고유의 개성을 버리는 일이 많다. 팔기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내다버리는 세대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로다. 내추럴 와인 붐에도 찬성하지 않고, 여전히 부르고뉴의 가격 정책에 불만이 크지만 그것만큼은 존중한다. 시원을 잊지는 말자는 것. 그 시원이 비록 지독히 쓰고 짜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