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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본문

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타인의 고통

진광불휘 2022. 9. 25. 14:19

 


“어둠 속에서 나는 울었어. 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혜은이 노래, <열정> (1985) 중에서 
 
 고통의 가장 난감한 점은 그것이 개별적이라는 데 있다. 몸과 마음의 고통은 아주 다양하고 또 진폭도 넓어서 타인의 고통을 속속들이 알기란 대단히 까다롭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고통만을 절감하거나 아주 가까운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데 그친다. 그래서 고통은 경험한 이들을 오히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류의 고집불통으로 만든다. 제가 앓은 고통을 바탕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연대를 두터이 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을 가진 타인의 처지를 구체적,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당연히 쉽지도 않고, 또 세세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슬픔은 인간이 가진 정서 중에서 가장 공감하기 쉬운 감정이다. 화면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보면 우리의 누선도 자극된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렵지 않게 감정이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화면이 바뀌면 우리의 공감도 이내 사라진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을 들여 타인에 집중하면서 그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뿐 아니라 이 슬픔을 위로하고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해야할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고통을 그저 남의 일만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 전체가 겪어야 할 고통의 크기도 줄어들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이상 위로하며 해결에 함께 나설수록 우리 삶은 덜 불행해진다. 응원과 지지의 연대는 결국 내 자신을 위해서도 절실한 일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질병이 가장 큰 불행이듯이, 질병이 가져오는 가장 큰 불행은 고독이다.”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163쪽, 이후, 2002

 질병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고통은 그것을 느끼는 이를 어쩔 수 없이 고독하게 만든다. 고통은 개별적이므로. 그러나 고통스런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다. 환자들의 연대가 아니라 공통의 연대가 필요하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전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픈 이들에게, 그런 말과 손길은 더 우선적으로 건네져야 한다. 공통으로 겪는 누군가의 고통이 오직 당사자에게만 짐지워질 때, 수잔 손택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사회적 추방이며 파문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외로이 혼자 울지 않기를 바란다. 바람을 넘어서, 나는 무엇이라도 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고통스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