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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모르면서

진광불휘 2026. 9. 1. 15:07

 

*
내 일은 언제나 한 지점을 깊게 파는 거다. 
파다 보면 별 게 다 나온다. 그 나온 것들 중에
가장 다감한 무엇을 이야기로 변환하는 거.
깊게 파기 위해선 언제나 넓게 파야 한다.
깔때기 모양처럼, 넓게 파야만 깊숙히 들어갈 수 있으니.

국내를 파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워낙 사료가 많고 또 기껏해야 한문이나 고어에 불과하니까.
그렇지만 타국을 깊게 파는 건 만만치 않구나.
자료를 걸러낼 역사적 교양도 없고 일단 언어에서부터 막히니.

그래서 정말 광활히 파게 된다.
내 나짱은 아주 넓어지고 있다.
그래서 좋은 점은 매번 설렌다는 것.
나쁜 점은 매번 두렵다는 것.
전혀 모르는 타국의 마을이므로. 


*
지옥으로 귀국해도 동료가 있으니 늘 괴롭지만은 않네.

십 년 전 정말 가고싶지 않은 모임에 사양할 핑계가 없단 이유로
발을 들인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모든 걸 잃고도 이게 남아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삶이란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데서 뜻밖의 풍경을 만나는 일이구나.
좋은 의미든 나쁜 뜻이든.


*
그러나 절정에 이르렀다는 건 
곧 내리막길이 나온다는 뜻.

이 시절도 곧 끝나리라.
당신들도 사라지겠지. 
누가 먼저 퇴장할지는 몰라도.


*
기다리는 일은 진짜 힘들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

그러나 모르지 않지.
아무 것도 기다릴 수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는 걸.

하여, 나는 계속 기다려야겠지.
중요한 건 무엇이 오느냐가 아니라
기다리는 일 자체에 있으니.
사무엘 베케트는 알았던 거다, 
설령 만나지 못하더라도 기대하고 열망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
알 지 못하고 쓰는 글이 있다.
스스로 쓴 글의 의미를 뒤늦게 발견하는 일이 있다. 
그걸 단지 어려서라고 할 수 있을지.
우리는 때로 미래를 내다본다.
그게 미래인 줄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