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케이머스 Caymus

진광불휘 2023. 10. 30. 23:08

 



 

케이머스, 에멀로, 스택스립, 뫼르소, 본 로마네, 샹베르땅, 블랙 매직 쉬라즈, 스테파니 알라노떼...

대중의 선호를 5점 만점으로 환산하는 와인평가앱 비비노에서도 4.5점을 홋가하는 와인들이다. 세상에 좋은 와인은 별처럼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훌륭한 포도주라는 뜻. 당연히 값도 비싸고 구하기도 어렵다. 나같은 포타쿠(포도주+오타쿠)도 계절에 한 번이나 마실까 말까다. 이런 걸 데일리 와인으로 마시면 금세 거덜날테니.

같은 포도로 만들고 양도 동일한데 왜 비싸냐, 라고 물으면 품질이 좋아서, 라고 답할 것 같다. 향기가 다채롭고, 첫 맛이 부드러우며, 타닌은 매끄럽고, 뒷맛까지 아련하다. 어느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 유리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부터 다르고, 술을 입안에서 음미한 후 삼키는 느낌, 그 직후까지 마치 드라마를 풀어내듯 운율과 고저가 있고, 긴 여운까지 선사한다. 진짜 좋은 술인 거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데도 마실 때 부담이 없고, 시간을 들여 잘 숙성한 까닭에 숙취도 말끔하다. 평소 주량이 한 병인 사람도 두 병을 마시게 된다. 와인은 향미물질의 복합체로 냄새 맡고 머금고 들이마시고 삼키는 모든 순간에 충만함을 느끼도록 양조되어 있다. 소주처럼 무미하지도, 맥주처럼 배부르지도, 위스키처럼 독하지도 않다. 기분좋게 뺨이 살짝 달아오른 채로, 그 이상 만취하게 만들지 않으며 두어 시간 고양감을 높여준다.

그래서 여럿이 함께 수다 떨며 마시기 좋은 술이다. 후딱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 아니다. 그 점이 장점이면서 또 단점도 되는 것 같다.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은 없듯, 술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자신의 취향, 여건과 잘 맞아야 한다.

좋은 일이 없는데도 가끔 좋은 술을 산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만 그런다면 일상이 너무 밋밋하니까. 영화 <사이드웨이>가 말했듯, 좋은 술을 마시는 날은 특별한 날이 된다. 그 반대가 아니라. 때로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서 일부러 사치를 부리기도 한다. 더이상 같이 마실 수 없는 밸류 와인은 때로는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다정했던 기억을 곱씹는 기회가 되기도 하니.

정말 오랜만에 케이머스를 마셨다. 1년도 더 넘은 것 같다. 여전히 향그럽고, 부드러웠고, 밸런스가 탁월했다. 피니쉬도 좋았다. 집에서 마셔도 혼자 마셔도 변함없이 정말 굉장한 와인이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함께, 케이머스를 마시고 싶구나.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얼마만큼의 와인병을 쌓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