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달려라 메로스"와 이와타 미쓰코의 "시각장애인 엄마, 그림책을 읽다"

진광불휘 2023. 10. 23. 00:45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집 <달려라 메로스>와 이와타 미쓰코의 <시각장애인 엄마, 그림책을 읽다>를 도서관에서 봤다. 미쓰코의 책에 중점을 두고 오사무의 책은 표제작이기도 한 <달려라 메로스>만 읽었다. 일본 소설에서 이 단편이 여러 번 다뤄지는 걸 보니 궁금해서. 이 소설은 단순 깔끔하고 또 고전적인 이야기였다. '혼네'와 '다테마에'가 단분되는 일본인이 좋아할 법한.  
 
<시각 장애인...>은 그 자신 맹인이기도 한 저자가 비장애인인 아들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 위해 분투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는 엄마에게 그림책의 페이지를 가리키며 이게 무어냐고 묻지만 보지 못하는 엄마는 당연히 대답해주지 못한다. 점자책은 읽을 수 있지만 그림책은 점자로만은 커버되지 않는 회화라는 정밀하며 또 정서적인 영역이 따로 존재하므로.
 
주인공은 그러다 그림책도 점묘라는 방식(재질까지 고려한 팝업북 같은 형태를 상상해보라)으로 시각장애인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수제로 생산되는 점묘책을 아이와 함께 읽으며 큰 행복을 느낀다. 결국 미쓰코는 직접 점묘책을 만들게 되고, 그 이상 점묘책 도서관을 운영하며 장애인의 시각 체험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게 된다. 그의 노력은 그야말로 굉장해서 그는 정책을 바꾸고 체신부(=정보통신부)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개인의 경험을 확장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행복을 공유하고 사회적 책임을 껴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한편 씁쓸한 감정도 솟았다. 요새 장애 관련 도서를 찾아보며 든 생각인데, 책으로 발간된 개개인의 성취는 정말 대단하지만 장애란 근본적으로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 어려운 조건이 아닌가.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더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는 이야기가 주류인데, 현실은 그럴 수 없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에게 그래도 괜찮다, 비장애인인 우리와 사회가 노력해서 당신들이 덜 노력하더라도 더 행복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말하는 게 필요하지 않은지.
 
한국사회가 헬조선이 된 게 각자의 처지나 사회적 여건을 살피지 않고 오직 '노오력'만 강요했기 때문이듯, 장애의 서사는 여전히 뻔한 구조에 갇혀 있다는 생각. 최근에는 그렇지 않은 책들도 발간되고 있으나 여직 다수는 직선적인 성취담에 그치고 만다는 문제가 있다.
 
가장 어려운 사람을 위해 조금 어려운 사람이 희생해 결핍을 메꾸는 방식이야말로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니까. 영웅 서사 말고 조금 더 래디컬한 변화를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얼 먼저 해야할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은 어떤 게 있을까. 사회가 요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고유한 자신의 말들을 내세운 이들을 다시 살펴봐야겠다. 도울 방법이 아니라 함께 할 방법을 찾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