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불휘 2023. 10. 13. 00:53

 

오랜만에 J를 봤다.
 
나를 위해 반차를 써서 4시간 넘게 달려왔다. 먼 타지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있는 그는 '다 적응됐다'고 거듭 말했으나 실은 하나도 그렇지 않아 보였다.
 
한참만에 둘이서 와인을 마셨다. 그도 이사 와 처음 가본다는 족발집에서. 해당 메뉴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 일부러 특대나 대짜를 시키자 강권했는데, 끝내 중자로 주문했다. 소주 한 병을 시키고 가져온 와인 반 병을 곁들여 마셨다. 다행히 음식을 잘 하는 집이었다. 족발, 겉절이, 계란찜, 콩나물국 다 괜찮았다. 2차를 갈까 동네를 돌았지만 이렇다 할 가게가 없어 집으로 돌아와 레드 와인 한 병을 더 따 자정 무렵까지 마셨다.
 
일이 그를 힘들게 하는구나, 느낀 건 여러 번이었는데 그 힘겨움이 이제 마음까지 좀먹었다 여겨진 건 처음이었다.
 
술을 마시기 전에도, 먹는 중에도, 깨고 난 후에도, 멀쩡할 때도 그는 이제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혼자 말했다.
 
그 말들도 정리되지 않고 머리 속으로 해야 할 것들을 그대로 꺼낸 게 대부분이었다. 상대가 듣고 있는지, 지루해하는지, 싫어하는지 살피지도 않으며 그저 제 말만 늘어놓았다.
 
동네를 돌 때도, 이 동네가 어딘지, 원래 동네와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게들은 어떤 게 있는지 본인에게만 중요했을 정보를 떠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사람아, 내가 그거 듣자고 여기 왔겠나. 요새 무슨 생각하는지, 뭐가 힘든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도울 건 없는지... 그런 말들을 한 번도 나누지 못 했다. 다음날 오후에 헤어질 때까지.
 
타향에서, 혼자 살며, 아무하고도 술 마시지 않고, 업무용 식사 외에는 저녁도 혼자 먹으며 살아가는 일은 참담한 것이겠다. 매주 돌아올 수도 없고 한 달에 서너 번만 부산 집으로 귀가하는 격무도 벅찼을 것이다. 누군가와 말한 지 오래 됐으니 혼잣말이 몸에 익었겠지. 할 일이 없어 저녁이면 잠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출근한다는 그가 많이 안스러웠다. 한다고 하는데 거리가 멀어 우리도 자주 보긴 어렵다.   
 
대신에 그는 매주 전화를 걸어온다. 주로 집으로 가는 금요일 밤과 회사로 돌아가는 일요일 낮의 운전하는 차 속에서. 아무런 용건 없이 그저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고 전화를 한다. 아마 나 말고도 친구들 여럿이 전화를 받고 있겠다. 그들과도 마음을 나누지 않겠지, 아니 못 하겠지.
 
사람은 훅 나이든다. 어느 날 갑자기, 대화를 못 하게 되고,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며, 속내가 뻔히 보이는 행동을 한다. 40대에 그러는 이도 있고, 50대에 그러는 이도 있다. 혹은 20대에 그러는 이도. 또 아무리 나이 들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역시 있다.
 
과하게 나이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살펴볼 여유가 필수겠지. 그의 노화는 곤경에 빠져 있다는 반증일 게다. 마음자리가 따스하고, 늘 누군가를 돕는 데 인색하지 않은 그가 이렇게까지 몰리다니. 주민을 위해 문화적인 일을 전담한다는 그 조직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 알 수 있다. 직원을 이렇게 대하는데, 하물며 주민을 위할 리가 없지.
 
그는 내년 초까지 그곳에서 일할 예정이다. 재계약은 아마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이루어진다 해도 문제. 그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그가 원하는, 새로 이사한 집 부근에서.
 
그가 썩 좋지 못하더라도 가능하면 자주 만나러 가겠다. 술 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하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그래봐야 신세진 걸 반도 갚을 수 없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