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상호 대차
진광불휘
2023. 7. 19. 01:14
한국의 지역도서관은 적은 예산과 인원의 한계를 극복코자 몇 가지 보완 체계를 고안했다. 그 중 훌륭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지하철역이나 동사무소의 대여반납기를 이용한 무인 예약대여 시스템이고, 나머지 하나는 상호대차다. 무인 예약 대여는 이름만으로 대충 짐작할 듯 하니까 설명을 생략하고, 상호대차는 ㄱ도서관에 없는 책을 ㄴ도서관에서 가져와 ㄱ도서관에서 대여를 대행해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사실상 여러 곳 동네도서관의 책을 한 곳에서 빌려볼 수 있는 편리함이 강점이다.
반대로 단점은, 타 도서관의 사정에 따라 상호 대차에 필요한 도서 이동 시간이 들쭉날쭉하다는 것이다. ㄷ도서관은 4일 정도 걸리지만, ㄹ도서관은 하루만에 오기도 한다. 그것도 매번 상황에 따라 다르다. 상호대차를 신청했다고 해서, 그 책을 며칠 안에 받을 수 있다는 확약 같은 건 없다. 그냥 기다려야 한다.
ㅈ도서관이 소장한 책이 필요해 늘 이용하는 ㄷ도서관에서 상호대차했는데, 그 다음날도 ㄷ에서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와보니 띵 하고 알림이 울렸다. 내가 상호대차를 신청한 ㅈ의 책을 땡겨왔으니 ㄷ에서 받아가라는 거다. 방금 거기서 돌아왔다구!
상호대차에는 기한이 있다. 아마 영업일 3일(주말 공휴일 불포함)인가 그럴 거다. 그래서 기한이 닥쳤길래 오늘 몸이 무거운데도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왔다. 이행하지 않을 시 일주일인가 대여가 안 되는 패널티가 있던 것 같다. 뭐 패널티 때문에 간 건 아니었으나.
이유야 어쨌든 도서관은 쾌적했고, 아직 초중고 방학 전이라 좌석에도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전에 빌린 책을 먼저 읽으며 폐관할 때까지 도서관에 머물렀다.
정신적 체력적 심리적으로 타격을 받아 도서관조차 찾을 수 없는 날들이 얼마 전까지 있었다. 지금도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꾸준히 일상을 회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은 삶의 안정과 직업적 학습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올해 내가 도서관에 얼마나 갈 수 있느냐가 생활의 건강을 확인하는 바로미터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자주 책을 빌리고 또 반납하는 게 좋겠다. 습관이 중요하므로.
구립도서관을 떠나있는 1년 동안 도서관도 많은 책을 구비했더라. 욕심은 부리지 말고 천천히 독서 리스트를 지워나가자. 특별하진 않아도 즐거우리라.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번거롭지도 않을테니. 이런 사소한 행복을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내 자신만을 위한 일도 아니다.
상황을 바꿀 묘책 같은 건 없다. 중요한 건 내 자신이 바뀌는 일이다. 그것만큼은 할 수 있다. 심지어 가장 선호하는 방식으로. 상호대차로 확장된 동네 도서관이야말로 내게 언제나 활짝 문이 열려있는 천국의 입구와도 같다. 고통을 견디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는 모른다. 그러나 면역은 평안한 생활로부터 비롯된다. 나를 지키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시 읽어가는 것이다.
오늘 빌려온 책에서, 죽고 싶다는 것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섬세해진다는 뜻일 게다. 섣불리 결론을 내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책에서 추동하는 욕망은 그렇게 식물적이다. 그래서 긍정한다. 이런 수긍이, 기호를 빚는 재료가 되겠지.
말장난을 하자면 상호는 서로, 대차는 빌린다는 뜻이다. 동네도서관에서 얻는 빚이 지금 내게는 한 줄기 빛이다. 대출도 자산이라는 경제적 아이러니를 이제는 실감한다. 이 빚들이 쌓여 숙려의 자산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