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불휘
2023. 3. 16. 21:51
아침 일찍 면허시험장에서 필기시험을 보고 왔다. 응시원서를 쓰고 신체검사를 받고, 필기까지 마치고 나니 겨우 9시 30분이었다. 근처에서 아침을 때우고 멀지 않은 데 사는 선배를 보러갈까 했는데, 일찍 연 식당도 드물고 선배도 오늘은 겨를이 없대서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아침을 해먹고 청소기까지 돌리고 나니 그제야 여유가 좀 생겼다.
친구 보호자에게 메일을 보내고, 다음에 만날 때 건네줄 선물을 챙겨놓고, 책 몇 권을 설렁설렁 읽었다. 도로주행 수업과 실기가 다음주에 있어 짬은 있었다. 이따가 와인이나 한 잔 마실까 해서 베란다에 한 병을 꺼내다 놓고 잠시 누웠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벌써 저녁. 마트에서 가볍게 안주나 사다 먹을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늦어 집에 있는 냉동식품을 오븐에 데웠다. 대저토마토와 사과도 씼어놓고.
와인은 좀 오바다 싶어서 음료장을 뒤지니 예전에 사둔 맥주가 한 캔 있었다. TV를 틀어놓고, 데운 닭튀김과 만두, 과일로 한 접시를 만들었다.
얼마만의 혼맥인가. 와인을 백만 배 더 좋아하지만 이것도 괜찮네. 일단 가볍고.
지난 10개월 동안, 절친만큼은 아니자만 나도 여러 번의 너울을 넘었다. 어떻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요양보호사를 따고, 장애인 활동 지원사 과정을 이수하고, 지금은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고 있다. 앞으로도 여러 과제들을 소화해야 할 것이다. 모든 과정을 잘 해내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못하더라도 힘이 될 수 있도록 성장하고 싶다.
그 모든 과정이 내 삶의 계획에는 없었던 것들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무언가가 벌어지는 법. 그것이 꼭 좋은 일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올해 봄부터 내가 직접 겪을 일들은 내 무력함을 확인하고, 보강하며, 고치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시간이 실질적인 지원의 날들이기를 바란다.
여전히 수많은 것들이 안개 속에 있다. 수없이 울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날들은 절친이 온힘을 다해 헤쳐나와 간신히 맞게 된 아주 기적같은 하루하루이기도 하다.
그 점을 잊지 말자. 언제나 고마워 하자.
맥주 한 깡 마시고서 주저리주저리 헛소리가 길었다.
내일은 더 따뜻하길, 그리고 절친에게 더 좋은 날이 되기를 빈다.
오늘은 좀 잘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