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국순당 와인 하** 매니저님께

진광불휘 2022. 10. 24. 22:07

 

영전을 축하드려요. 더 넓고 매출도 높은 곳으로 가셨으니 앞으로 더욱 건승하실 거예요.
 
이래저래 5년 넘게 인연이 이어졌네요. 집에서 가까운 롯데백화점 와인매장에 국순당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가 연락처를 남겼더랬죠. 행사 있을 때 연락주십사 해서.
전에 친구가 롯백 자양점에 반디앤루니스라는 서점 체인의 점장으로 있어
종종 그 옆 국순당 매장에서 와인을 샀거든요. 품질이 훌륭하고 또 값도 좋아서,
이왕이면 가까운 데서 사면 좋겠다 생각했다가 인근에 입점했다는 뉴스를 보고서요.
 
와인 세일이 시작된다는 첫 문자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가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몇 병의 와인을 사들고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권해주셨던 게 지금도 제 최애 중의 하나인
레이몬드 R 컬렉션이었어요. 까쇼, 메를로, 레드 블렌드 3종이 있었는데, 어느 것을 살까
제가 고민하자 매니저님께서는 뭐가 가장 궁금하냐 여쭤봐 주셨고, 까쇼와 레드 블렌드
가운데 뭐가 나을까 갈등중이라 했더니 레드 블렌드를 사가라 권하시고는 곧바로
까쇼 한 병을 열어 시음을 시켜 주신 후, 남은 까쇼를 스토퍼로 밀봉해서는
구매 사은품으로 이것도 가져가라 포장해 주셨죠. 찾아와 연락처 남겨주신 데 대한 감사의 의미라며.
그때 정말 깜짝 놀랐어요. 레이몬드 와인은 병당 3만원 정도 하는 중고가의 포도주였던데다
그날 제 구매금액이 10만원 이쪽저쪽이었을텐데, 도저히 사은품으로는 내줄 수 없는
비용이었으니까요.
 
그 날을 시작으로 1년에 서너 번 씩 얼굴을 뵙고 와인을 샀습니다. 행사한다고 문자를
주실 때마다 족족. 기억으로는 제가 무주에 있었던 딱 한 번인가 빼고는 '올 출석'이었다 싶습니다.
다른 백화점 와인샵 매니저님들과는 다르게, 뭘 사라 강권하신 적도 없고, 묻지 않으면
딱히 추천을 해주시지도 않았더랬지요. 그저 묵묵히, 제가 사는 와인을 담아서 포장해 주시고는
늘 감사하다, 고 말씀해주시는 백화점 매니저님스럽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대신 이건 어때요, 라고 질문하면 아주 정직하게, 이건 아주 맛있어요, 후회 안 하실 거예요,
혹은 이건 저도 안 마셔봤어요, 나중에 마셔보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등등
꼭 와인 동호회의 지인처럼 대답해 주셨지요.
 
실제로 매니저님이 괜찮다고 한 와인은 모두 훌륭했고, 그래서 제가 꼽는 최고의 와인
대부분은 매니저님을 통해 마신 국순당 와인들입니다. 스테파니, 레이몬드 R, 뮤지움,
비냐 포말, 더 로쉐... 가성비를 넘어서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을 했고, 그래서 여전히
인연을 이어오는 거겠죠. 늘 좋은 와인을, 마케팅과 상관없이, 정직하고 또 성실하게
알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아주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인연이 깊어지면서, 제가 이른바 '단골'이 된 것 같아요. 단순히 와인샵 매니저와
고객 정도로는 볼 수 없는 계기를 여러 번 선사해 주셨습니다. 매장마다 몇 병 주어지지
않는 한정판 와인을 제 과도한 주문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받아주신 것. 종종
기념일을 챙겨주신 것, 사은품 목록에도 없는 선물을 보내주신 것, 제가 궁금해하는
와인을 그냥 한 병 끼워주신 것 등등... 사실 저는 도저히 '큰 손'이라 볼 수 없는
1회 구매액 10만원에서 30만원, 연간 구매총액이 100만원 이쪽저쪽에 불과한 그야말로
'조막손' 고객에 다름아닌데도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것에 대해 지금도 항상 놀라고
또 마음 깊이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가장 감동적인 일은 지지난 번 행사였을 거예요. 행사 중인 평일, 오전에 그냥 스윽
들렀는데 마침 매니저님이 휴가시라고 매장에는 알바 한 분만 계시더라구요.
뭐 꼭 인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와인을 사가면 되니까, 주문하면 나중에 아실테니까.
그 알바분께 몇 병 주문을 하고 택배를 부탁하면서 매니저님께 문자 한 통을 드렸습니다.
'휴가시라 들었습니다. 주문넣고 갑니다. 다음에 뵐께요. 늘 감사해요. 편안한 휴일 되세요.'
그러고 매장을 떠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지요. 받아보니 매니저님이셨습니다.
'저 지금 출근하는 길이예요. 15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안 바쁘시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와인 사러 평일 오전에 백화점에 오는 작자가 바쁠리야 있겠습니까. 지하2층
식품관을 구경하며 잠시 놀았습니다. 그리고 매니저님을 만났지요. 평범한 안부인사를 나누고
알바 분께 했던 주문을 확인하고 특별한 일 없이 매장을 뒤로 했습니다. 그런데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다른 매니저분들의 대화들이었죠. 오늘 휴가 아니었어?
무슨 일이야? 오해나 착각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마도 매니저님은 그날 진짜 휴가셨는데
제 문자를 받은 김에 그냥 매장에 나오신 건 아닌가 싶습니다. 괜히 문자를 드렸나
죄송하기도 했고, 또 사무치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어요.  
 
연락처가 있으니까 SNS에서도 자동으로 '친구 추천'이 떠서 온라인 상에서도 서로
왕래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본의아니게, 아주 사적인 정보도 알게 되는데, 이를테면
'오늘은 ***님의 생일입니다' 같은 정보가 주어지니까요. 그러면 사실 고민하게 됩니다.
늘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시는데, 하다못해 기프티콘이라도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비용이 아까워서는 아니고 그러다 늘 말게 되는 이유는 '이게 고객이 선을 넘어서
매니저님 사생활에 끼어드는 게 아닐까' 싶어서예요. 제가 젠더상 남성이고 매니저님은
여성이므로 그런 부분에 좀 더 예민해지게 됩니다. 호의란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
거절하기 어려운 것들, 그런 게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저는 지금 늘 받기만 하고
답하지 않았던 그간의 시간을 이렇게 변명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용서해 주세요.
 
저번 행사에서는 제가 좋아하는 V와인이 가장 낮은 급만 있고, 최애하는 그 윗급이
소개되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이건 이번에 세일 안 하나 봐요 여쭈었을 때
매니저님은 흔쾌히, 사실 이게 일곱 병 밖에 남지 않아서 세일 품목에 포함하지 않았어요,
필요하시면 드릴게요, 하셨습니다, 제가 일곱 병 전부 가져가도 될까요 재차 묻자
매니저님은 당연하죠, 가져가세요, 해주셨지요. 그리하여 역대 가장 낮은 가격에
V와인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잘 마실게요. 덕분에 행복하게 와인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매번 챙겨주셔서 감사하고, 그이상 송구합니다.
 
와인매장에도 부침이 있고, 직장인이란 회사의 사정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밖에
없는 까닭에, 매니저님의 이동은 불가피한 일이겠지요. 전과 달리 거리가 멀어지면서
뵐 기회가 아무래도 적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허락해 주신다면, 어디로 가시든, 전화나 문자를 통해서라도 계속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지금과 같이, 꼭 혜택을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미 받을 것은 충분히, 아니 그 이상 받았으니까. 와인을 함께 마시는 동료들에게도,
또 지인들에게도 늘 추천하겠습니다. 곁에 신뢰하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요. 거기다 그가 정직하고 또 성실하기까지 하다는 것은요.
저 역시 그런 손님이, 아니 사람이 되도록 늘 스스로를 살피겠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괜한 신경을 쓰시게 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모두 잘 이루어지시길 빌게요. 앞으로도 변함없이 인사드리겠습니다.
영전하신 근무처에서도 무탈하시길 기원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 2022. 10. 22. 정원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