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김학중, "현수막"
진광불휘
2022. 8. 6. 16:37
늦여름 새벽, 새벽마저 첫차를 기다리는 정거장에 서서 뒤돌아보니 그늘막 속 희미하게 밝아오는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이 보였다 시간은 침묵하고 있었다 아니 침묵이 시간을 펼쳐두고 있었다 그 사이 마스크를 올려 쓴 몇몇 사람들이 정거장에 왔다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침묵에 귀를 기울이며 점멸하는 정거장의 안내판에만 가끔씩 눈길을 주었다 그늘막 뒤편 포도밭에는 줄지어 영그는 포도송이가 무심하게 가지런했다 농익은 포도향이 시간의 침묵으로 스며들었다 포도알처럼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하려는 말이 무언지 알아채기 전에, 환하게, 아침은 오고 버스는 승객들을 태우고 떠났다 정거장에는 현수막만이, 아침햇살 속에 색이 바랜 글자들을 펼쳐두고 남겨졌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자의 빛깔을 더듬으며 여전히 시간은 그 자리에 있었다
- 김학중 시, <현수막> 전문, 웹진 『시인광장』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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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시간은 그 자리에.
김학중 시인의 눈은 있는 것을 본다기보다, 고고학자처럼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현재완료형으로 들여다 보는구나. 그리하여 그의 시에서 종종 위로를 받는 것은 스쳐가는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해서가 아니라 무수한 빌드업 끝에 간신히 도착한 지금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