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불휘 2022. 7. 26. 14:33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15쪽)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궤적을 만든다. 존재의 흐름과 궤적, 그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 운명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종결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145쪽)
  -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중에서, 그린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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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평하자면, 고미숙은 인문학 기획상품을 잘 내놓는 작가다. 임꺽정, 호모 에로스, 열하일기... 그녀의 글은 가볍고 신랄한 문체 덕분에 쉽게 읽힌다. 해석이 풍부해 사유가 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텍스트에 대한 공부는 얕다. 그건 단점이면서 또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시대니까. 

 
하지만 그만의 해석에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최소한,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다. 
사랑만이 아니다. 모든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나의 문제다. 객관적인 조건을 따져보는 게 중요하지만
거기서 내가 어떻게 해왔는가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그럼에도' 싸운 사람들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