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불휘 2022. 6. 20. 21:17

 

몇 년 전에 2만원인가 3만원을 주고 샀던 중국산 선풍기 한 대가 덜덜거려서 손을 봤다.
덤벙덤벙 곰발바닥 같은 손으로 덮개망을 분리하고, 다섯 잎 날개를 뽑고, 구석구석을 닦았다.
닦는다고 소리가 안 날리는 없겠으나 벌써 여름이고 이제부턴 매일같이 써야 하므로.
그물망의 살을 따라 걸레를 문지르자 올챙이 모양으로 뭉쳐 뚝뚝 떨어지는 먼지.
윤활유를 가져와 동력 계통에 찍찍 뿌렸다. 남은 기름이 흘러나올 것이므로 한 번 더
모터 부근을 닦아준 후 해체할 때와 역순으로 재조립했다.
 
효과가 있다. 떨림이 줄었다. 잘 때 틀고 자도 귀에 걸리적거리지 않을 수준.
 
거짓말처럼 여름이 돌아왔다. 6월 중순까지 덥지 않아 올해는 견딜만 하다 싶었는데.
여름철엔 사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더위가 날 미치게 하니까. 체액이 끓고 짜증이 치솟으며
불쾌감이 온 몸을 뒤덮는다. 에어컨 켜진 실내만이 답이지만 그건 또 죄스러우니까.
 
지캉스, 라고 했지만 아직 지캉스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아마 시작일을 찾는다면 5월 23일, 그리고 한 달 째인 오늘 6월 20일이
성수기에 들어간 날이겠지. 잘은 몰라도 앞으로 한 달이 고비가 될 것이다.
조용해진 선풍기와 이 길고 답답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날들을 잘 보낼 수 있길 바란다.
 
참을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내게 인내를 가르쳐줘서 고맙다. 잘 배울게.
그러니 나중에 꼭 육성으로 칭찬해 주렴. 그 말을 꼭 듣고 싶네.  
 
선풍기만 떨고 있는 건 아니다. 이 더위 속에서 나 역시 덜덜거리고 있다.
그러나 나를 고친다고 해서 이 떨림이 사라질 건 아니다.
그가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까지 돌이켜 다시 살 수 있을까.
사실 어느 경우에도 그럴 순 없다. 오로지 현재만 존재한다.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되새김질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멈춘 시간 속을 걷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통은 생생하게 이 삶이 나의 것임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내가 고통스럽다고 그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없구나.
 
함부로 살아온 이에게 시간이란 이토록 잔혹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차피 떨림은 피할 수 없었으리라.
지캉스가 마무리되면 이 일로부터 내가 충분히 배웠기를.
다시금 흘러갈 시간 속에서 내가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늦게나마 할 수 있기를.
 
바램만 자꾸 덧붙여본다. 연거푸 움켜쥐어도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주문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