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나를 알아주는 벗

진광불휘 2022. 5. 24. 00:02

 

이덕무의 <책에 미친 바보>를 읽었다. 거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들은 이덕무가 친구들에게 보낸 짧은 편지들,
'척독'일 것이나, 그밖의 산문들도 비록 고지식함이 지나친 부분은 있었지만 하나같이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이덕무가 벗에 대해 읊은 글을 만나서, 나는 오래 그 페이지를 쓰다듬었다. 그가 말하는 대상은 벗이었으나
실제 그가 토로하고 있는 것은 고독이며, 간서치로 책만 읽고 사는 일의 쓸쓸함이 깊이 묻어난 까닭이다.
 
아울러 이옥의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도 더불어 읽게 되었는데, 정조 시대 엄혹한 문체반정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이덕무와 이옥의 운명이 조각배처럼 흔들렸던 것을 알고 마음이 쓰라렸다.
그나마 이덕무는 왕의 총애라도 받았으나 이옥은 패관소품(체)을 썼다는 이유로 거의 평생을
그야말로 '간서치'로 살 수 밖에 없었던 때문이다. 이옥의 책에 나오는 대필문장가 '유광억'의 이야기가
나에게는 이옥의 꿈처럼 들렸다. 감정의 세세한 무늬라는 부분에서는 이덕무가 훨씬 뛰어났으나
편견없이 세상을 보는 관점의 너비라는 측면에서는 이옥이 단연 도드라졌다. 그렇지만 이옥의 경지는
결국 선비로서의 불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랴.
 
이덕무의 '나를 알아주는 벗'을 여기 옮긴다.
내가 아는 한, 친구에 대해 쓴 글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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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아주는 벗/이덕무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10년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10일에 한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으리라.
이것은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다음 ,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 예스러운 옥으로 막대를 만들리라.
 
이것을 가지고 뾰족뾰족하고 험준한 높은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이 있는곳,
그 사이에 펼쳐놓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 뉘엿누엿 해가 저물 때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간절히 원하지만 다정한 벗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없는 마음은 꽃가루를 묻힌 나비를 맞는 꽃과 같다.
나비가 오면 너무 늦게 온 듯 여겨 조금 머무르면 소홀히 대하고 , 그러다 날아가 버리면
다시 나비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지극한 즐거움이 드문 것인가. 이러한 즐거움은 일생에 단지 몇 번 찾아올 뿐이다.
눈 오는 새벽이나 비 내리는 밤에 다정한 벗이 오지 않으면 , 누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것인가.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면 듣는 것은 내 귀요, 내 손으로 글을 쓰면 구경하는 것은 내 눈이라,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원망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