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불휘 2022. 4. 27. 00:06

 

슬플 애, 와 슬퍼할 도, 로 이루어진 애도哀悼는 말 그대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뜻한다. 왜 감당할 수 없느냐면, 대상이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더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서 파생되는 고통과 우울의 후폭풍이 애도다. 상실은 괴로운 일이고, 죽음은 영원한 상실이며, 그래서 애도는 대개 사별로 겪게 된다. 갑자기 나눠진 세계의 확연한 분계선 앞에서 뒤늦께 깨닿는 감정의 오열인 것이다. 당신은 강을 건넜으나 나는 이편에 남고 말아서, 눈물로 강을 이뤄서라도 당신의 강과 나의 강을 이어가고자 하는 행위가 애도다.
 
애도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애란 글자가 슬플 애가 아니라 사랑할 애라고 생각했다. 사랑해서 슬픈 일이 애도일 거라고. 그래서였나.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나는 지각한 이들이 늘어놓는 변명처럼 그제야 허겁지겁 사랑한다고 고백하곤 했다. 바보같은 짓. 이제 들어줄 사람은 없는데. 마치 그가 다시 살아돌아올 주문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거듭 외쳤다. 사랑해라고. 그리고 내가 뱉은 말은 힘없이 내 귀로 다시 돌아와서 고막을 두드리고는 그 옆에 자리한 누선을 터뜨렸다. 통곡했다. 그것은 아무런 효능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애도는 결국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자꾸 선생님이 뜬다. 알 수도 있는 사람 목록에 친구 신청하라며 로그인할 때마다 눈길을 빼앗는다. X표를 클릭해 지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 했다. 선생의 인스타는 비공개로 되어있어 사진을 볼 수도 없다. 당신이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사진을 공개처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친구신청을 한다해도 받아줄수도 없으리라. 그 이도저도 불가능한 무력감이 나를 다시금 애도의 우물에 빠지게 한다. 당신이 떠났는데, 당신은 여전히 내 곁에 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도 자꾸 다시 나타난다. 팔로우를 하고, DM으로 어떤 말을 쓸 수는 있겠지만, DM은 발송되더라도 그 말이 선생께 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 는 말은 그저 알리바이를 자백하는 행위인 것도 같다. 전에 그랬어야 했지만 하지 못해서, 아주 뒤늦게서야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 그것만은 알아달라고 강변하는 행위. 그 무력한 짓을 되풀이하는 일이야말로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얼마나 더 울고 통곡해야 애도를 끝낼 수 있을까. 후회로 가득한 저수지에서 가책을 한 바가지씩 퍼내는 일, 그런 게 애도의 작업일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선생께서 떠난 세계에 아무 일도 없이 사는 삶이 칼날을 씹는 일 같다. 말이 자꾸 겉돌고 눈만 붉어질 뿐이다. 당신은 어찌하여 떠나셨습니까.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은데. 정말 어쩔 줄 모르겠는데. 사랑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일이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해서도 당신에게 닿지 못하는데. 이런 게 죽음이라는 것일진대 아직 살아있는 나는 유물론자라 다음 생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만약 한 번 더 삶이 진행된다면 그때는,
 
댁에 찾아가 선생님과 술을 마시고 싶다.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달지 않은 막걸리 몇 병과 홍어회를 싸들고 방문해, 그것뿐이면 재미없으니까 커다란 해바라기 몇 줄기를 함께 사서. 집안에 활짝 핀 태양이 선생님을 비출 때 나는 딴청 부리며 서재의 책장이나 하나하나 훑어보며 이 책은 언제 읽으셨어요, 어떠셨어요, 손때 묻은 책 한 권만 주세요, 떼쓸 것이다. 용돈을 주니 마니 다툴 것이다. 시시콜콜한 이 얘기 저 얘기를 끝도 없이 나누다 마침내 얼큰하게 취해 되도 않는 주정을 부리면서 선생님의 체취가 가득 배인 집과, 그리고 어떻게 해도 선생님일 수밖에 없는 선생님을 오래오래 눈에 담고 싶다.
 
실제로 삶은 단 한 번 진행된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 속에서 수없이 다른 경우의 수를 상상하고 또 상상해 보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어떤 상상 속에서도 내가 선생님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정말 모르겠다. 당신이 이 세계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그냥 거짓말 같다. 모두가 나를 속이려고 온 세상이 짜고 치는 거짓말. 그럴 리가 있겠나. 그치만 정말,
 
그렇다면 좋겠다.  
 
아직도 나는 선생님의 명복을 빌지 못한다. 명복이란 저승에서 누리는 복락. 그러나 이 세계에서 당신이 응당 누렸어얄 지복이 새까맣게 남아있는 것만 같아서. 그런데도 당신없이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는 오늘이 사뭇 두려워서. 아무리 저어가도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 듯한 저편의 강이 까마득히 멀어서. 그리고,
 
남은 세계를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이 삶이 때로는 너무 아득하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