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라, 여기가 로도스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선, <1984 최동원>
진광불휘
2021. 11. 24. 23:06
조은성 감독의 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은 정말로 1984년의 최동원에 관한 이야기다. 케이블 스포츠 채널만 돌려봐도 최동원의 다큐를 쉽게 만날 수 있는 현실에서 조은성은 그의 삶을 포커스 아웃하며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가 낳은 서글픈 초상으로 추억하기 보다 야구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한 인간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 줌인하며 끔찍한 불행조차 행복으로 바꿔놓은 일종의 연금술사로 스포츠맨 최동원을 기리려 한다. 그라운드에서 함께 뛰었던 수많은 동료, 선후배들의 인터뷰와 당시의 야구 현장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영화는 1984년 시즌을 차례로 복기하고 마침내 전설이 된 그해의 한국시리즈로 줄달음친다.
이 영화의 가장 특별한 지점은, 최동원 말고도 수많은 이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끔찍하게 혹사당하며 야구를 해왔다는 암담한 사실도 아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따뜻한 현실도 아니다. 진정으로 이 영화가 아름다운 건 카메라의 문법, 그러니까, 고인을 추모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알다시피, 최동원의 말년은 쓸쓸하고 처참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공식 석상에 나섰을 때, 달라진 모습에 동료들은 물론, 기자들도 경악했을 정도니. 그러나 영화는 관객들의 감정을 가장 고조시킬 수 있는 당신의 최후를 돋을새김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마운드에서 전설의 승리를 얻었던 가장 빛나는 순간에 바쳐진다. 감독은 그를 비극적 히어로로 평가하려는 이전의 고답적 시도를 철저히 배격하며 뻔한 슬픔으로 보는 이를 몰아가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킴으로서 야구의 존엄까지 지켜낸 진짜 승리자로 최동원을 바라본다. 이 영화가 상업 영화관에 걸린 대중 다큐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런 감독의 자세 혹은 고집은 탄복을 넘어 존경심까지 들 정도다.
안 그래도 울고 싶은 일이 많은 요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1984 최동원>을 보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들었던 1984년 프로야구의 수많은 사실들, 그러나 이제 도식화된 장치가 되어버린 그 낱낱의 편린들 속에서 한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맘 편히 객석에 앉길 바란다. 하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위해 다른 이들을 모두 어둡게 처리하기 보다 하나를 들여다 보는 시선이라면 나머지에게도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열린 마음가짐으로 영화의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내면까지 가 닿고자 한다. 카메라가 가장 많이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장면은 최동원의 아주 환한 웃음인데, 한국 영화가 누군가의 미소를 이렇게나 자주 보여주었던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80년대는 최동원을 아낌없이 써먹고 나서 철두철미하게 배신했고, 끝내는 버렸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슬픔은 거기서 비롯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최동원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젊음도, 젊음 이후의 삶도 전부 야구에 바쳤다. 야구는 최동원이 아니었지만, 최동원은 곧 야구였다. 생의 불꽃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슬픔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